세계 동물의 날 특집 조선 왕들의 동물 사랑 이야기

그러나 예상과 달리 청군이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일본 정부는 청과의 충돌을 회피하려고 발을 빼고, 조선 내부의 지지도 얻지 못해 권력을 장악한 지 3일 만에 실패하고 말았다. 고종의 친정을 계기로 흥선대원군이 권좌에서 물러난 뒤 명성황후는 점차 여흥 민씨 인물들을 중심으로 자파 세력을 형성하여, 1895년 시해될 때까지 조선의 정치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1880년 이후 명성황후의 친족들이 중앙정계의 요직을 거의 다 차지하여 매관매직과 조세 증수 따위의 전횡이 심하여 민심의 반발을 초래하였다. 17세기 후반 청의 중국 지배가 확고해지자, 사림세력 각자의 내심이 어떻든 겉으로는 공통의 목표이던 북벌론이 힘을 잃어, 붕당 사이에 대립이 재연될 가능성이 커지게 되었다.

 

역은 정(丁)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초기에는 호(戶)를 매개로 한 정이라는 관념이 짙었다. 과전법의 답험손실법은 공법으로 바뀌면서 일정한 세율을 적용하는 정액수세법이 되었다. 그리고 조와 세가 통일되었으며, 10분의 1조가 20분의 1세로 반감되었다. 결부법(結負法)은 토지 면적과 그 토지에서의 수확량을 이중으로 표시하는 독특한 계량법이었다. 벼 한줌을 1파(把)라 하고, 10파를 1속(束), 10속을 1부(負), 100부를 1결이라 하였다.

 

그 이유는 필화 사건, 즉 사화(史禍)가 일어날 우려가 높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사초를 본 사관이 그 내용을 누설할 경우 중죄에 처하도록 하였다. 일본은 조선에서 도자기와 활자 등의 기술을 배워갔으며, 성리학 등 학문 발전의 계기가 되었다. 임진왜란 후 조선과 일본의 관계는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가 서자 일본의 요청으로 1609년(광해군 1)에 기유약조를 맺어 통교를 재개하였다. 조선 통신사는 일본에 경조(慶吊)의 일이 있을 때마다 에도〔江戶〕까지 내왕하였는데, 비단 외교사절일 뿐 아니라 문화 전파의 역할까지도 담당하였다.

 

북한의 시장상인들은 국경만 열리면 중국과 무역이 재개되고 시장상황이 좋아질 것이라는 기대가 높았을 것이다. 그 요인은 대부분 중국 측이 예전과 달리 북한과의 무역에 소극적이었기 때문이다. 중국 기업들은 북한과의 무역을 이어가기 위해 후불조건을 수용해왔다.

 

당시의 정치세력이 알고 있는 범위 안에서 판단하면, 국왕의 붕당에 대한 정치 주도권 행사가 가장 확실한 대안이었다. 그 뒤 동인세력은 서인을 철저히 배척하는 북인과 그것을 반대하는 남인으로 나뉘었다. 비변사는 임시기구로 설치되어 이미 상설기구로 기능하고 있었으나, 전란에 대비하는 데에는 중심 기구로 거의 구실을 하지 못하였고, 전쟁이 일어난 뒤에야 중심 기구로 작동하였다.

 

의정부는 형식적으로는 동반의 최고 관서이나, 서반의 최고 관서인 중추부에 담당 직무가 없었던 까닭에 실질적으로 서반까지 아우르는 최고 관서였다. 조선 초기에는 의정부와 육조 사이에 권한 변동이 생김에 따라 관원들의 의견이 의정부의 의결권을 통해 반영되던 의정부서사제주69, 육조가 모든 정무를 왕에게 직접 고하고 왕명을 직접 집행하던 육조직계제주70가 반복되었다. 그런데 정부가 독립협회 회원을 유언비어 유포죄로 체포하고 재판 없이 황제의 칙명만으로 유배형에 처하자, 독립협회도 자유 민권 운동과 내각 개편 운동, 나아가 의회 설립 운동을 벌여 대응하였다.

 

조선 전기에는 무나 오이 등을 소금물에 담가 절인 김치였으나, 고추를 사용하면서 우리가 아는 김치 쪽으로 변화하였다. 장류에 간장과 된장에 고추장이 추가되었고, 젓갈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민요는 노동 생활이나 민속놀이 과정에서 자연 발생한 것으로, 대부분 창조자와 부르는 사람이 따로 구별되지 않고 대중 속에서 널리 불리면서 다듬어지고 완성된 노래들이다. 물론 민요 가운데는 특정인이 대중의 생활 감정을 반영하여 창작한 것도 있다. 그러나 오랜 세월 구전되는 과정에서 창작자의 개성은 사라지고 보편적 정서만 남게 되어 집단의 창작물로 전환된다. 우리나라의 구전 민요는 내용과 기능에 따라 크게 노동요, 세태 민요, 민속놀이 민요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판소리의 창자들은 창을 엮어냄에 있어서 새로운 이야기를 창작하기보다는 전래하여 오던 설화를 근간으로 하여 그것을 다채롭게 윤색하고 개작하였다. 이렇게 해서 일단 성립한 작품들은 창자들의 사승 및 교류에 따라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승되면서 다시 부분적으로 개작되고 확장되어 매우 다양한 내용과 음악적 표현을 축적하게 되었다. 열두마당 중에서 현재까지 창으로 전해지는 「 춘향가」, 「 흥보가」, 「 심청가」, 「 수궁가」, 「 적벽가」를 전승 5가라 한다. 판소리는 소리꾼주204이라고 하는 가수가 북재비주205라는 고수의 북 장단에 맞추어 부르는 민속 가요의 한 형식이다. 판소리는 처음에 전라도를 중심으로 한 남도 지방에서 발생하여,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판소리 명창들이 남도 지방에서 배출되었고, 오늘날 판소리를 ‘남도창’이라고 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함으로써 대북세력이 정국의 주도권을 잡았다. 이것은 대북세력이 세자 시절 광해군을 지원하였고, 또 임진왜란에서 의병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으며, 일본에 대해 전쟁을 주장하며 명분을 쌓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광해군은 여러 붕당의 협조 위에 정치를 하고자 시도하여, 처음에는 대동법 실시와 같은 성과도 낼 수 있었다. 그러나 결국 대북세력에게 끌려다니는 꼴이 되어, 사림세력 대부분이 그의 적이 되었다. 국왕이 관직자에게 충성을 요구하는 물적 토대의 힘이 약해짐에 따라 일반 관원들은 그들의 특권을 뒷받침할 새로운 수단을 찾고자 하였다. 그 가운데 가장 유력하였던 것이 자신이 유교가 지향하는 덕목을 갖춘 군자주22임을 증명하여 드러내는 것이었다.

 

이어서 명종 때에는 명종의 모친 문정왕후(文定王后)가 8년의 수렴청정이 끝난 뒤에도 명종의 배후에서 권력을 행사하였다. 중추부는 조선 초기 동안 국왕과 궁궐 호위, 군대 지휘, 군사 기밀 등을 담당하기도 하였으나, 등급이 하나 낮은 오위도총제부가 이 직무를 담당토록 하고, 중추부는 직책이 없는 고위 관원을 대우하기 위한 관서로 활용하였다. 아울러 오위도총제부는 등급이 같은 병조의 감독을 받도록 하여, 양반관료제가 문신 중심으로 운영되도록 하였다. 이 동안 조선에서는 많은 법령을 만들었다가 바꾸고 폐지하기를 거듭하면서 법제를 정비하였다. 조선은 건국 직후 첫 법령집으로 『 경제육전』을 반포하였으나, 고려의 제도에서 벗어나 조선의 제도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진행됨으로써 폭넓게 새 법령들을 만들어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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